끝없이 일을 해야 하는 뇌에 허락된 단 하나의 선물은 망각, 즉 잊어버리기라는 말이 있다. 고통을 잊지 않으면 고통의 기억 속에서 계속 상처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을 기억해야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르는 또다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이리라. 기억과 망각의 절묘한 조화가 생명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잊으면 미래도 없다는 경구도 의미있게 들린다. 독재자의 자녀가 다시 권력을 잡는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힘들었던 과거를 잊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지난 몇년 간 전 인류를 공포와 고통으로 몰고간 코로나19 팬데믹도 이제는 우리의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기억과 망각의 저울 위에서 기억의 비중이 훨씬 커야 할 때도 있다. 최소한 감염병에 한해서는 잊음의 미학이란 없어야 한다. 코로나19라는 세계적 독재자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면.
코로나 제대로 규명도 못했는데 예산 삭감
2019년 코로나19가 처음 보고되고 2020년 초 세계보건기구(WHO)가 공식적으로 팬데믹을 선언하고 나서 2023년 5월 종결선언이 있기까지 3년 4개월 동안 인류는 전에 없던 도전에 직면해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의연하게 극복해 냈다. mRNA 백신이라는 혁신적인 백신의 등장이 팬데믹 종식에 엄청난 역할을 했다. 그 일을 최초로 이루어낸 학자들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제 돌이켜 보면 지난 3년 4개월 동안 우리가 겪었던 고통이 다 기억되어 있는가? 최소한 우리 정부는 팬데믹이 끝났으니 그 분야에 투입되던 연구예산은 이제 그만 투입해도 된다고 믿는 것 같았다. 2023년 하반기에 터진 정부 R&D 예산삭감 파동의 표적 중 하나는 코로나바이러스 연구 관련이었다. 이렇게 잊어도 되는 일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계속되는 위험도 있고,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 루트도 다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닌 다른 바이러스의 공격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코로나19 장기후유증(long COVID, 롱코비드)이 실재하는 위험이고 이 위험을 끝낼 연구와 대책이 필요하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공식적 설명에 의하면 롱코비드는 코로나에 감염된 후 3개월이 지나도 다른 병명으로 설명되지 않는 증상을 보이는 경우를 일컫는 용어다.
그 증상은 다양한데 가장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만성피로 호흡곤란 인지기능장애 등이라고 한다. 그 외 정말 다양한 증상이 보고되고 있어서 다른 병과 구별하기 쉽지 않고 심지어 꾀병이라고 할 수도 있는 복잡한 증후군이다.
지난 5월 말, 네덜란드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롱코비드 환자의 혈액에서 항체 IgG 전체를 추출해 생쥐에 주입해 주었을 때 롱코비드 증상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냄을 발견했다. 이는 롱코비드가 환자의 몸에서 만들어진 자가항체에 의한 증상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의 항체를 투여하는 것만으로 생쥐에서 증상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사람 항체의 존재가 롱코비드 증상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충분조건이다. 이런 류의 연구가 축적되어 롱코비드에 대한 진단, 치료가 가능해 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코로나 침투 초기반응 연구가 의미하는 것
코로나19가 창궐했을 때 이 질병이 어디에서 생겼을까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 논란은 우리가 코로나19를 격퇴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어디에서든 이런 팬데믹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왔는가’보다 과학적 관점에서 더 중요한 문제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에 들어왔을 때 초기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이다. 초기반응을 알면 가장 이른 시기에 바이러스를 제어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인 2021년에 이런 생각을 한 연구진이 영국에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실험을 했고 3년간의 연구 끝에 2024년 6월, 드디어 그 결과가 발표되었다. 지금은 집단면역 상황이 되어서 더는 할 수 없는 실험이었는데 다행히 팬데믹의 초기에 멋진 아이디어를 가진 연구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한 일은 놀라운 용기와 도전의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얼마나 위험할지 알지 못하던 때에 코로나19 바이러스에 한번도 노출된 적이 없는 자원자 16명을 모집해 아주 소량의 정확한 양만큼 살아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투여하고 28일 동안 실시간으로 이들의 코와 혈액에서 시료를 채취해 단일세포 수준에서의 유전체 발현 양상에 대한 분석을 심도 있게 진행한 것이다.
대부분 18~ 30세 사이의 청년들이 자원했고 이들의 용기가 코로나19 바이러스 초기 침투 시 사람 몸의 반응을 규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네이처에 발표된 이 논문에 의하면 16명의 자원자 중 6명은 가벼운 증상을 보이는 감염상태가 되었고 실제로 계속 바이러스 검사에서 양성으로 조사되었던 반면 10명은 감염상태가 지속되지 않았다. 10명 중 3명은 감염 초기에 양성으로 잠시 나타난 반면 7명은 감염 초기부터 바이러스 검사에서 양성으로 조사되지 않았다.
이들의 감염정도의 차이는 투여된 바이러스의 양이 동일했기 때문에 순전히 각 개인의 신체적 반응의 차이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어떤 유전자들이 먼저 작동하는지, 어떤 면역반응이 먼저 또는 나중에 작동하는지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이 실험에서 아주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고 앞으로의 코로나19와의 전투에서는 조기에 승리할 수 있는 기틀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는 백신을 신속하게 만들 수 있어서 코로나19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앞으로의 팬데믹을 예상한다면 미리 백신을 만들어서 가지고 있다면 더 빨리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매년 반복되는 인플루엔자 백신의 경우는 다양한 인플루엔자에 다 적용되는 범용백신을 만들 수 있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상할 수 없는 감염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즉각적으로 새로운 백신을 만들 수 있는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중요하겠다.
새로운 팬데믹 가능성 바이러스가 발견되면 가동할 수 있는 플러그-플레이 플랫폼이 준비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mRNA 백신이나 아데노바이러스 기반 백신 제작의 플랫폼이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백신의 형태도 개발되면 좋겠다. 예를 들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코를 통해 침투하므로 코에 뿌리는 백신을 개발하는 노력이 성과를 거둔다면 감염초기에 제어할 수 있고 주사바늘을 쓰지 않고도 접종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박쥐 매개 바이러스는 여전히 위험
가장 무서운 시나리오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바이러스의 침공이다. 모기를 매개로 하는 바이러스를 포함해 많은 바이러스들에 대해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이유다. 특히 우리가 집중해서 살펴봐야 하는 동물은 박쥐다. 그동안 많은 감염병이 박쥐를 매개로 했고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아직도 많은 종류의 박쥐 매개 바이러스들이 인간을 감염시킬 가능성을 품고 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좀 더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바이러스 전문 연구자가 많지 않다. 한때는 각광받는 연구 분야였지만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 자체보다는 바이러스를 운반체로 하는 유전자 치료가 더 많은 주목을 끌어 바이러스 연구자들이 유전자치료 연구자로 변신하였는데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기초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기후위기로 대표되는 지구상의 변화된 환경에 생물들이 적응해가면서 멸종의 단계에 들어간 수많은 동물 종들이 있다. 인간이 그 중 하나가 되지 않으려면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열심히 해서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