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의 7월9일대로(Avenida 9 De Julio) 중심에 위치한 복지부 건물 외벽에는 마이크를 잡은 에바 페론(Eva Peron) 형상의 대형 조형물이 걸려있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에바 페론의 이름과 이미지는 100페소 지폐, 관공서, 공공시설, 소설, 연극, 영화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녀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아르헨티나 팜파스의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에비타는 배우로 활동하다 후안 페론(Juan Peron)과 결혼해 영부인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남편인 페론과 함께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정치운동인 페론주의를 창설했다.
여성운동가로 그리고 노동자와 하층민의 어머니로 33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은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어졌고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노래는 전세계적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70년 전 아르헨티나인들은 에비타의 죽음에 슬픔의 눈물을 흘렸지만, 오늘날에는 에비타의 페론주의가 남긴 유산으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화폐가치 하락에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세계 10대 부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락
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는 인구 4600만명의 국가로 역사적으로 보건과 교육의 가치를 중시한 결과 중남미에서는 가장 낮은 문맹률과 높은 인간개발지수(0.849, 193개국 중 48위)를 자랑하는 나라다. 또한 셰일가스와 리튬 등의 자원을 대량 보유한 국가 중 하나이며 옥수수 대두 소고기 등 세계 최대의 식량생산국이기도 하다.
19세기 말에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번영했으며 전세계의 인재와 투자를 끌어들이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1915년 아르헨티나는 총길이 3만3000km의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선을 가진 세계 10대 철도강국 중 하나였다. 그리고 1913년에는 중남미 최초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상류층들은 도심의 프랑스풍의 대저택에서 파리에서 유행하는 패션과 각종 사치품들을 소비하며 유럽인들과 동등한 생활수준을 누렸다.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 아르헨티나는 세계 10대 부국 중 하나였지만,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집권했던 후안 페론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책과 과도한 정부지출로 인한 국가 부의 낭비로 경제는 한세기 이상 쇠퇴했다. 2003~2008년 연평균 9%에 달하는 높은 경제성장을 달성하며 아르헨티나 경제는 다시 살아나는 듯 했지만 최근 12년 동안(2011~2023년) 평균 성장률 0.8%를 기록하며 성장이 정체되었다.
장기불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2019년부터 연간 50%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이 시작됐고 달러 대비 페소의 가치가 폭락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570억달러를 대출해주며 위기진화에 나섰으나 경제 안정화에 실패했다. 팬데믹 기간 아르헨티나정부가 더 많은 돈을 찍어내며 2023년 인플레이션은 211%로 치솟았다. 국가부채도 2023년 말 4470억달러에 달했다. 올해까지 갚아야 하는 부채가 168억달러에 달한다.
아르헨티나를 떠나는 다국적기업들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불안정과 직원 해고금지, 수출과 수입에 대한 복잡한 규제, 달러 환전의 어려움과 복잡한 환율체계, 아르헨티나정부의 부채 상환능력에 대한 우려, 소비자의 구매력 감소 등을 이유로 최근 아르헨티나에서 사업을 접고 철수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2019년부터 50여개의 기업들이 아르헨티나를 떠났다. 중남미 최대 항공사인 라탐(LATAM) 항공사는 페론주의 노조와 대립하다 15년 만에 아르헨티나 국내선 항공편 운영을 영구중단했다. 아메리칸항공사도 아르헨티나행 노선 중 하나를 폐쇄하고 현지발급 신용카드 결제를 종료했다. HSBC은행은 그루포 피난시에로 갈리시아(Grupo Financiero Galicia)에 사업을 매각했고, 세계 비료산업 선두주자인 뉴트리엔(Nutrien)은 브라질에서의 소매사업에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아르헨티나 사업을 매각했다.
바카 무에르타(Vaca Muerta) 셰일유전의 엄청난 생산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엑슨모빌(ExxonMobil)과 칠레석유공사(Enap)도 아르헨티나 내 자산을 매각했다. 자동차코팅제 제조사 엑솔타(Axalta)와 페인트 제조사 바스프(BASF), 그리고 자동차 제조사인 혼다 폭스바겐 포드 역시 투자를 중단했다. 이들 외에도 아디다스 나이키 자라(Zara) 월마트 팔라벨라(Falabella) 글로보(Glovo) 이타우(Itau) P&G 페트로브라스(Petrobras) 클로록스(Clorox) 등과 같은 기업들도 아르헨티나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밀레이정부의 개혁정책과 사회적 반발
이러한 상황에서 무정부 자본주의와 기득권 타파를 주장하는 정치 신인인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가 돌풍을 일으키며 2024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20년간 나라를 통치했던 좌파정부의 국가주의와 보호주의는 국가의 뿌리 깊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밀레이는 선거 유세에서 정부 지출 삭감을 상징하는 ‘전기톱’ 정책과 경제의 달러화(Dolarization) 등 파격적인 공약을 제안했다. 그리고 취임하자마자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재정적자 제로 달성을 목표로 공무원 감원, 공기업 민영화, 보조금 축소, 지방정부에 대한 재정지원 중단 등 정부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페소화 가치를 100% 평가절하하는 등 파격적인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급격한 공공지출 감소로 아르헨티나의 정부 재정은 10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아르헨티나의 국가 위험등급이 하락하고 금리도 111%에서 40%로 인하됐다.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도 조금씩 늘었다.
그러나 임금성장률이 인플레이션에 뒤처지고 가처분 소득의 감소로 구매력이 하락하고 경제 활동은 크게 위축됐으며 실업률과 빈곤이 증가했다. 사회적 합의 없이 밀어붙인 개혁안에 노조 시민 주지사들이 저항하며 대립이 심화됐다.
최근 산안드레스 대학의 여론조사 결과에서 응답자의 63%가 현 국가상황에 ‘불만족’을 나타냈으며, 정부 신뢰도가 동 시기 마우리시오 마크리 정부와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정부보다 낮게 나타났다. 70%(Zubancordoba 실시)가 넘는 시민들이 현재의 구조조정 비용을 ‘카스트(기득권)’가 아닌 자신들이 내고 있다고 믿었다.
인플레로 인한 고통 견뎌낼지가 관건
지난 6월 말 밀레이정부 취임 6개월 만에 경제개혁안인 ‘기본법(Ley de Base)’이 의회에서 승인됐다. 해당 법안은 대통령의 1년간 특별 입법권한, 국영기업 민영화, 노동법 완화, 투자유치를 위한 감세 및 투자 인센티브 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의회 의석의 겨우 10%만을 보유한 밀레이정부에게 이번 ‘기본법’ 통과는 상당한 정치적 성과다
하지만 이제부터 경제현실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전임정부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됐다. 앞으로 국민들은 밀레이정부에게 경제개혁의 성과를 요구할 것이다. 실업률과 빈곤 증가에 따른 경기침체로 전체 국민의 절반이 영향을 받고 있고 인플레이션은 연간 280%에 달하며 ‘기본법’ 통과로 소득세 인상이 임박해 있다. 여론조사는 밀레이를 지지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의 인내심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은 아르헨티나의 성장 전망치를 -3.5%로 하향 조정해 발표했다. 결국 밀레이정부의 개혁 정책의 성공은 아르헨티나 국민이 높은 인플레이션이나 경기침체로 인한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