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주의’란 ‘주권적 정당성의 원천인 국민이 선출한 의원들로 구성된 합의기관인 의회가 입법 등의 방식으로 국가의사결정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정치원리’를 말한다. 헌법학자들은 우리 헌법이 ‘의회주의’를 통치구조의 기본원리의 하나로 하고 있다는 점에 의견 일치를 이룬다.

이 의회주의의 기본원리 중 하나로서 ‘공개와 이성적 토론의 원리’가 곧잘 거론된다. 즉 국민의 대표로 구성된 의회는 우선 공개적이고 개방적인 토론의 장이 됨으로써 의사결정의 공정성을 담보하고 이성적 토론을 통해 조정과 통합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한 이성적 토론을 거친 후에는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인 다수결원리에 따라 최종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의회주의의 본질이자 기본원리이다.

그러면 현재 대한민국 국회에서 헌법상의 의회주의원리는 잘 지켜지고 있는가? 최근 국회의 방송4법 심의과정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결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무려 5박 6일에 걸쳐 본회의를 열고 법안마다 24시간 이상의 필리버스터가 이어지는 여야 대치정국이 펼쳐졌다.

의회주의 원칙과 먼 국회, 국민 피로감만

8개 원내정당 중 여당을 제외한 7개 정당이 참여해 국회 본회의에 법안이 상정되면 필리버스터와 24시간 후의 종료 의결이 이어지고 본회의에서 해당 법안이 통과된다. 그러면 다시 범야권 주도로 다른 방송4법 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되고 똑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24시간 동안 이어진 필리버스터에 국회의원들의 참여는 저조했고 착석한 의원들도 졸기 일쑤였다.

의회주의의 본질 중 하나인 ‘이성적 토론’은 없었고 각 당의 지지층에게 보여주기 위한 명분쌓기용 정치만 난무했다. 더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5박 6일이 걸려 법안을 통과시켜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라는 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당은 실제로 최근 국회를 통과한 방송4법에 대해 거부권 행사 건의를 재차 공식화한 바 있다.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이 행사되면 법안은 국회로 다시 돌아와 재의결을 거치게 되는데, 이 경우 여당의 의석수가 재적의원 1/3을 훌쩍 넘는 108석인 상황에서, 법안 재의결을 위한 정족수인 출석의원 2/3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해 그 법안은 폐기된다. 법안 심의 및 통과와 관련해 국회에서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도돌이표 정국이 상시화되어 가고 있다.

분명 의회주의원리와는 거리가 먼 국회 현실이고, 이를 지켜봐야 하는 국민들의 피로감만 높아가고 있다. 국회라는 공간에는 이제 이성적 토론에 의한 대화와 타협은 없고 대립과 갈등만이 넘쳐난다.

문제는 시급한 민생법안마저 이러한 여야대치 국회에서 입법화에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민생회복지원금법안이 한 예다. 최근에 발표된 국세청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폐업신고를 한 사업자가 개인과 법인을 포함해 100만명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절반인 약 50만명이 ‘사업 부진’을 이유로 폐업했다고 한다. 2007년 이후 역대 두번째로 높은 수치이다.

민생회복지원금 법안에는 고물가 상황에서 민생회복지원금이 물가에 악영향은 주지 않으면서도 내수진작에 기여할 수 있는 ‘경제마중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전(全)국민을 대상으로 1인당 25만원에서 35만원 이하의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한 금액을 ‘지역사랑상품권’ 형태로 지급하고, 지급일로부터 4개월 이내까지 사용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일부에서는 이 법안이 정부의 예산편성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정부에 재정지출 의무를 부과하는 입법이지 법 자체가 예산안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민생회복지원금과 관련한 정부의 예산편성에서 구체적인 지급액 및 지급 시기는 여전히 정부가 대통령령으로 정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예산안편성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여야, 민생법안에 대한 이성적 토론에 나서라

이러한 법안도 입법화하지 못한다면 국회는 더 이상 ‘민생국회’를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여야는 이제라도 법안에 대해 이성적 토론에 나서야 한다. 그래서 타협할 것이 있으면 타협하고 조정할 것이 있으면 조정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노력없이 여당은 법안 상정을 말라는 요구만 반복할 뿐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야당은 같은 내용의 법안을 계속 밀어붙이며 정부는 대통령 거부권으로 응수하는 이 소모적이고 반(反)의회주의적인 상황을 길게 인내하며 지켜봐 줄 국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