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정년연장·호봉제 폐지 놓고 수년째 대립

노조, 65세 정년 연장·60세부터 임피 도입 주장

사측 "나이 따라 오르는 호봉제 임금 비합리적"

최근 대법원에서 임금피크제 관련 판결이 나오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과 법적 소송이 확산될 조짐이다.
국내에서 임금피크제를 가장 먼저 실시한 은행권은 지난 20년 가까이 제도를 시행했지만 더 이상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60세 정년이 법적으로 의무화된 상황에서 20년전 만든 제도가 더 이상 몸에 안맞는 옷이 됐다는 주장이다.
은행권 노사는 이미 수년전부터 단체교섭 과정에서 정년연장과 임금체계 개편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소모적인 논쟁만 이어지고 있다. 국내 은행권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논란과 실태 및 과제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금융노조와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는 지난 14일 서울 중구에 있는 은행회관에서 올해 임금 및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가졌다. 사진 금융노조 제공


지난달 대법원에서 정년을 연장하지 않고 임금을 삭감하는 방식의 임금피크제가 위법하다는 결정이 나오면서 은행권도 이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할 조짐이다. 일부 은행은 이미 임금피크제 대상자를 중심으로 소송이 진행중이고, 노조가 나서 본격적으로 대응하는 곳도 나오고 있다. 은행권이 중심이 된 금융노조도 올해 단체협상에서 정년연장을 주장하면서 노사간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은행 다이어트용으로 변질된 임피제

시중은행과 국책은행, 지방은행을 비롯해 금융공기업 노조가 참여하는 금융산업노조는 2004년 7월 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사측과 노사 단체협약을 통해 당시까지 58세인 정년을 59세로 1년 연장하는 대신, 55세 또는 56세부터 순차적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앞서 2003년 금융공기업인 신용보증기금이 개별 노사차원에서 도입에 합의했지만 산업별 노사합의로 동시에 도입하기로 한 점에서 획기적인 진전으로 평가받았다.

금융노사의 합의로 이듬해부터 주요 시중은행과 국책은행은 속속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정년을 연장하면서 임금은 깎는 방식이다. 예컨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2005년부터 당시 55세였던 정년을 59세로 연장하면서 만55세부터 직전 연봉의 80%에서 1년에 10%씩 59세(50%)까지 깎는 방식이다. 임금피크에 들어가면 직무를 전환하도록 했고, 퇴직 이후 계약직 등으로 다시 채용할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됐다.

시중은행인 우리은행도 2005년 1월부터 정년을 만 59세로 연장하고, 55세가 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직무전환 및 단계적 임금삭감 등의 방식을 채택했다. 이후 다른 시중은행과 지방은행도 개별 은행의 사정에 따라 일부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55~56세부터 임금을 단계적으로 삭감하면서 정년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실시했다. 금융노사는 2020년 단체협상에서 임금피크제 도입시기를 57세로 늦추는 데 합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행권 임금피크제는 은행들의 감원용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로 주요 시중은행은 최근 5년간 1만5000명이 넘는 직원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났다. 2017년 4936명이 퇴직하는 등 매년 2000명 이상이 희망퇴직하고 있다. 지난해도 4088명이 희망퇴직으로 은행을 떠난 것으로 집계됐다. 정의당 배진교 의원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주요 시중은행은 1인당 평균 3억원 이상의 희망퇴직금을 비용으로 썼고 총 비용은 3조원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금융노사, 단체협상서 임금피크제 쟁점화

금융노조와 금융사용자협의회는 지난 14일 서울 중구에 있는 은행회관에서 올해 3차 산별교섭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노조측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임금피크제와 관련 정년을 65세로 연장하고, 임금피크제에 돌입하는 연령을 60세로 늦추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사용자협의회는 정년 연장은 현행 연공서열식 호봉제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면서 논의할 수 있다고 맞받았다.

금융노사는 최근 수년 전부터 이 문제와 관련 논의를 해오고 있지만 진척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박홍배 금융노조 위원장은 21일 내일신문과 통화에서 "기존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사업장에서 워낙 다양한 케이스가 있어 수많은 소송으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이제는 임금피크제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고, 대안은 정년을 연장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에 맞다"고 말했다.

이에 사용자협의회 관계자는 "현행 연공급제의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정년 연장은 불가능하다"며 "현재 노사가 TF를 구성해 운영하지만 가동은 전혀 안되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사용자측은 지금과 같은 호봉제가 계속될 경우 장기적으로 은행의 근본적인 경쟁력도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사용자측 관계자는 "인터넷뱅크 등장이후 은행의 디지털화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은행의 디지털화가 가속화되면 기존 은행원의 존재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경직된 임금체계의 근본적인 개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이와 관련 "사측이 호봉제의 개편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협상을 해보면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지 않다"면서 "임금체계를 어떻게 바꾸자는 것인지 사측이 먼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으라"고 반박했다.

양측은 다음달 5일 4차 산별중앙교섭을 진행할 예정인데 올해 임금인상 폭을 놓고 노조(6.1%)와 사측(0.9%)의 이견이 커 파행이 예상된다. 노조는 이르면 다음 산별교섭 이후 협상 파기를 선언하고 중앙노동위 조정신청과 함께 본격적인 쟁의행위 수순을 밟을 수 있다는 전망이다.

한편 국책은행과 시중은행 노조와 직원들의 임금피크제 소송도 계속되고 있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산업은행 시니어노조 원이 지난해 제기한 "직원 동의 없는 임금피크제 적용은 무효"라는 소송에서 최근 1심 재판부는 원고 패소판정을 내렸다. 산업은행 시니어노조는 임금피크제에 들어간 직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제2의 노조로 이들은 지난해 초 임금피크제로 줄어든 임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국책은행인 기업은행도 고참 직원들을 중심으로 소송을 제기해 현재 1심이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KB국민은행의 경우 임금피크 대상자들의 집단소송이 진행중인 가운데 노조가 나서 임금피크제 관련 소송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지금 임금피크제에 들어가는 50대 후반 직원들이 입사할 때는 3저 호황 등으로 국내 경제가 좋을 때였다"면서 "당시 대부분의 국책은행과 시중은행은 수백명 많게는 천명 단위로 신입직원을 뽑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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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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