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정부가 분쟁해결절차 나서야 할 작위 의무 인정 어려워"

조선인 전범 피해자 제기한 헌법소원 5(각하) 대 4(위헌) 결정

헌법재판소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으로 강제동원됐다가 전범으로 처벌받은 조선인 피해자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배상문제 해결을 촉구한 헌법소원에 대해 부적법하다는 이유로 각하결정을 내렸다. 한국인 전범의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는 위안부·원폭으로 인한 피해와는 차이가 있고, 정부가 일본과의 분쟁해결절차에 나서야 할 작위의무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4인은 반대의견을 통해 "한국정부가 전범 피해자들의 인간의 존엄을 침해한다"며 위헌(인용) 의견을 제시해 관심을 끌었다.

헌재, 조선인 전범 피해자 헌법소원 선고│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8월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산소에서 열린 조선인 전범 피해자 헌법소원과 방송법 조항 헌법소원 등에 대한 선고를 위해 대심판정에 입장,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헌재는 지난달 31일 조선인 전범 생존자들의 모임인 동진회 회원과 그 유족들이 한국정부가 한국 출신 전범 문제를 방치해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어 이를 확인해 달라며 제기한 헌법소원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5(각하) 대 4(위헌) 의견으로 부적법 각하결정했다. 각하결정이란 헌법소원의 요건이 충족되지 못해 본안결정을 내리지 않는 형식재판의 일종이다.

헌재는 일제강점이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일제에 의해 포로감시원으로 강제동원돼 일본군 명령에 따라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다가 국제전범재판소에 회부돼 제대로 된 조력을 받지 못하고 처벌받은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국제전범재판소 판결이 국제법적으로 유효하고, 대한민국을 비롯한 국내 국가기관이 이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국제전범재판소 판결에 따른 처벌로 생긴 한국인 전범 피해 보상 문제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나 원폭피해자 등이 가지는 배상청구권 문제와 동일하게 볼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절차에 나아가야 할 구체적 작위의무가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헌재는 한국인 전범들이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인해 입은 피해의 경우에 대해서는 일본의 책임과 관련해 협정 해석에 관한 한·일 양국 간의 분쟁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지 여부가 불투명해 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절차에 나서야 할 작위의무가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4인은 반대의견을 통해 일제강점기 한국인 전범들이 입은 피해 가운데 국제전범재판에 따른 처벌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다수의견에 찬성하지만, 일제의 불법적인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이 협정에 따른 분쟁해결절차에 나서지 않은 부작위는 한국인 출신 전범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해 위헌이라고 봤다.

한국인 전범들은 일제의 반인도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로 인한 피해를 인정받아 진상규명법에 의해 설치된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강제동원 피해자 또는 희생자'로 인정됐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피해배상청구권을 가지고 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는 배상청구권과 성격이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재판관 4인은 한국인 전범들이 일제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배상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는지 여부에 관한 한·일 양국 간의 해석상 분쟁이 존재하고, 우리 헌법의 전문과 인간의 존엄성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10조 등에 비추어볼 때 대한민국에게 분쟁해결절차에 나아가야 할 구체적 작위의무가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반대의견은 한국인 전범들이 1991년부터 일본 법정에서 진행해 온 소송이 패소 확정됐고, 일본 정부의 자발적 구제조치를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간을 지체할 경우 한국인 전범들이 침해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제의 불법적인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는 국제전범재판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작위의무를 이행한다고 해서 국제전범재판 판결에 배치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결국 재판관 4인은 기본권의 중대성, 기본권 침해 구제의 절박성, 기본권의 구제가능성, 진정으로 국익에 반하는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대한민국의 한일청구권협정의 해석상 분쟁이 존재함에도 한국인 전범의 분쟁해결절차에 나가지 않은 부작위는 인간의 존엄성 등을 침해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안성열 기자/변호사 sonan@naeil.com

안성열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