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영국의 데이비드 라미 외무장관은 브뤼셀을 방문해 유럽연합(EU)의 주제프 보렐(Josep Borrell)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와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이어 라미 장관은 EU 27개국의 외무장관 회의에도 참석해 우크라이나 지원책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2020년 1월 31일 영국이 EU에서 탈퇴(브렉시트)한 후 영국 외무장관이 브뤼셀을 방문해 회의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7월 4일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정권교체에 성공한 영국 노동당정부는 브렉시트 과정에서 악화됐던 EU와의 관계를 개선하려한다. 그래야 노동당정부가 최우선 정책으로 정한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보수당이나 극우정당인 영국개혁당 등의 반발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바람에 통상확대조차 쉽지 않다.
영국과 EU 정상회담 정례화 합의
외무장관뿐만이 아니라 총리도 여러 유럽 인사와 접촉을 늘려왔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지난 3일 브뤼셀을 방문해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두번째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영국과 EU는 내년부터 연례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두 지도자는 “성장과 번영을 촉진하는 데 영국과 EU가 함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며 “기후위기와 에너지안보, 불법이민의 단속과 안보강화처럼 공동의 도전에 함께 대처할 수 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스타머는 EU 중추국인 독일과 프랑스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노동당정부 출범 후 채 4개월이 안됐지만 EU와의 관계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에 힘입어 브렉시트 협상과정과 탈퇴 후 EU와 쌓였던 감정의 앙금이 점차 허물어졌다. 브뤼셀에서도 도버해협에 자욱이 끼었던 안개가 점차 걷힌다는 말을 하며 영국과 협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역설적이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영국과 EU를 가깝게 만들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 후 영국과 EU는 러시아 규탄과 우크라이나 지원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또 중국의 부상에 공동대응하는 것도 양자에게 이득이다. 하지만 안보위협에 공동대응해 온 현실적인 필요성에도 노동당정부는 EU와의 관계 개선에 3개의 ‘레드라인’을 만들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
자유이동·단일시장·관세동맹 재가입 ‘노’
지난 7월 조기총선에서 노동당은 ‘EU 회원국 시민들이 자유롭게 영국으로 들어오거나 이민을 늘리는 그 어떤 정책도 합의하지 않겠다’,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에 재가입은 없다’는 ‘3불 정책’을 공언했다. EU 회원국 시민들은 여권이나 비자없이 다른 회원국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나 브렉시트로 EU 회원국과 영국 간 시민들의 자유이동이 사라졌다. 보수당이나 영국개혁당 일부에서 노동당이 집권하면 브렉시트를 번복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노동당은 이를 의식해 그럴 일은 결단코 없을 거라며 레드라인을 넘지 않겠다고 강조해왔다.
3개의 레드라인을 지킨다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매우 제한적이어서 무역 확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3불’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동식물 검역협정을 체결해 통관 비용을 절감하고 공산품 규제도 일부 EU 규정을 준수하겠다는 것, 그리고 건축사와 변호사 같은 전문직 자격증의 상호인정을 EU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영국의 돼지고기와 양고기 등이 EU 회원국으로 수출된다. EU 27개 회원국들은 브렉시트 후 영국산 동식물 제품 수출품에 대해 철저하게 통관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영국이 EU와 이 통관을 철폐하거나 대폭 간소화하는 협정을 맺는다면 영국 수출업자들에게는 그만큼 이득이다.
현재 EU는 비회원국인 스위스와 동식물 검역협정을 체결해 양자의 수출품에 대해 통관검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스위스는 EU 사법기구인 유럽법원의 관할권을 인정한다. EU와 분쟁이 발생하면 스위스가 EU법을 따른다. 영국은 이런 게 싫어서 EU에서 탈퇴했다. 그런데 다시 유럽법원의 관할권을 인정할 수 있을까?
영국 애시턴대학교 연구진은 영국이 스위스처럼 검역협정을 체결한다면 EU에 수출하는 86억파운드(2023년 기준)의 농산물 수출품 가운데 22% 정도인 20억파운드(약 3조4000억원) 정도의 수출이 증가하리라고 추산했다.
지난해 영국은 EU에 약 1500억파운드 어치의 상품을 수출했다. 검역협정이 체결된다고 해도 영국이 얻는 이득은 연간 수출 총액의 1.3%에 불과하다. 중요한 공산품 규제는 일부만 EU 규제를 따르겠다는 식의 불분명한 입장이다. 레드라인이 관계개선에 장애물이 되는 셈이다.
관계개선 제스처만으로는 통상확대 안돼
이처럼 노동당정부는 경제성장이 도움이 되는 무역관계 확대에도 극도로 신중하다. 사실 노동당은 650석 가운데 412석을 확보해 의회에서 어려움 없이 관련 조약을 비준할 수 있다. 브렉시트가 단행된 지 4년 10개월이 지나가지만 아직도 보수당이나 영국개혁당은 EU와 통상관계 개선도 반대하며 노동당을 집중 공격한다. 실용주의가 내재화한 영국이라지만 적어도 브렉시트 문제에서는 아직도 이념이 앞선다.
가장 최근에는 청(소)년의 자유이동이 이슈가 됐다. 18~30세의 EU 회원국 청소년들은 다른 회원국으로 자유롭게 이동해 최대 4년간 일할 수 있다.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들에게 유럽통합의 성과인 자유이동을 체험하게 하고 상대국의 문화 등을 익히게 하는 게 목적이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청년층의 2/3는 EU 잔류를, 노년층의 2/3는 브렉시트를 지지했을 정도로 세대 간 갈등이 첨예했다.
따라서 영국이 EU와 청소년 자유이동 협약을 체결한다면 청년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기에 세대갈등도 줄이고 경제적으로도 영국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된다. EU 27개 회원국으로 가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다른 일자리를 얻어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타머 총리는 이런 협약조차 레드라인에 배치된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브렉시트로 영국 무역의 절반 정도가 가는 EU와의 교역이 줄어들었다. 코로나19가 종료된 2023년의 경우 영국의 대EU 상품 수출은 2019년과 비교해 11%p 줄었다. 이를 만회하려면 비EU 지역으로의 수출이 늘어야 하지만 이 역시 11%p 감소했다. 하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시장을 아직 개척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9일자 사설에서 노동당정부에게 좀 더 전향적으로 EU와 관계를 개선하라고 주문했다. FT는 EU와 청소년 자유이동 협약을 체결할 경우 EU측에서도 변화된 영국정부의 움직임에 상응하는 조치로 화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0으로 만들겠다는 EU의 그린딜과 영국정부의 녹색전환도 같은 목표를 지닌 정책이기에 협력을 강화할 수 있다. 특히 영국 북해는 재생에너지 허브와 유사한 기능을 하기에 에너지 교류 확대로 영국과 EU에 상생이 된다고 강조했다.
EU는 2026년부터 탄소국경세를 시행한다. 철강과 알루미늄 같은 산업의 경우 제조과정에서 탄소를 순배출했다면 EU로 수출할 때 추가로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영국은 탄소국경세를 2027년부터 실시한다. FT는 같은 목적의 이런 정책도 영국이 EU와 정책조정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타머 총리는 지난 14일 구글 등 200여명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들을 런던으로 초청해 투자유치를 위한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글로벌 기업들은 약 500억파운드의 투자를 약속했다. 그러나 막상 경제성장에 도움이 될 EU와의 교역관계 확대는 너무 신중하기에 이런 투자유치 움직임과 대조적이다. 노동당정부가 보여주는 EU와의 관계개선 제스처는 좋지만 이것만으로 통상관계가 확대되지 않는다. 영국이 실용주의를 복원해 EU와 더 포괄적으로 무역을 확대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