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회복에 제약 많아 … 집단소송 도입 후 11건 그쳐

한국증권법학회 16일 증거개시제도 도입 필요성 논의

오스템임플란트 횡령사건과 관련한 투자자들의 증권집단소송이 제기된 지 9개월 가량 지났지만, 소송 요건 확인을 위한 피해자 확정 작업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까다로운 소송 허가와 투자자의 증거 확보 어려움 등으로 증권집단소송제도의 실효성이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한국증권법학회는 미국과 같은 방식의 증거개시제도(디스커버리)의 도입 필요성을 논의했다.


18일 오스템임플란트 증권집단소송 투자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법무법인 한누리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말 제기한 소송은 증권집단소송의 법적요건을 갖추기 위해 피해자를 확정하는 작업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진행이 되지 않고 있다. 한국거래소에서 거래자료를 받아 피해자가 몇 명이고 피해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가려내고 있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예정이다.

증권집단소송 제기 요건은 피해자가 50인 이상이고,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가 보유하고 있는 증권의 합계는 회사 발행 증권 총수의 1/10000 이상이어야 한다.

피해자들은 거짓 기재된 사업보고서를 신뢰하고 오스템임플란트 주식을 매수했다가 확정적으로 손해를 입은 투자자들이다. 거짓 기재를 포함한 사업보고서와 첨부서류가 공시된 2021년 3월 18일부터, 횡령사실이 드러난 2022년 1월 3일까지 오스템임플란트 주식을 매입했다가 그 주식을 2022년 1월 3일부터 거래정지 전 주가가 회복되기 전까지인 2022년 9월 5일 사이에 매수가액보다 낮은 가격으로 매도한 경우다.

2021년말 오스템임플란트에서 2215억원대의 횡령사건이 발생했으며 회사의 내부회계관리제도의 부실이 드러남에 따라, 주가 급락으로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었다. 투자자들은 "내부회계관리제도가 제대로 설계·운영되지 않고 있음에도 마치 제대로 설계·운용되는 양 사업보고서 등에 기재한 것은 투자자들의 합리적인 투자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사항의 거짓 기재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2005년 시행 이후 소송 11건, 장기간 재판에 소송 꺼려 = 증권집단소송은 2005년 시행됐지만 그동안 제기된 소송은 11건뿐이다. 오스템임플란트 소송은 2016년 1월 제기된 동양네트웍스 증권관련집단소송사건 이후 약 7년 만이다. 집단소송은 피해자 집단에서 한 명 또는 여러 명이 대표당사자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할 경우 피해자 집단 전체가 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소송허가절차와 본안소송 등 사실상 6심으로 진행되는 구조여서 판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소송들을 보면 통상 7~8년이 소요됐다는 점에서, 소송비용을 소송대리인(변호사)이 먼저 부담하고 사건을 진행하는 집단소송 특성상 변호사들이 선뜻 나서기를 꺼리는 게 현실이다. 특히 집단소송을 제기할 만한 사건들은 주로 기업들이 증거를 갖고 있어서 피해자들의 증거수집이 어렵다는 점에서 승소 가능성도 떨어진다.

미국에서는 피해자들이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절차(디스커버리)가 마련돼 있어서 재판 이전이나 재판 과정에서 화해·종결을 통한 신속한 피해 회복이 가능하다. 피해자들이 증거를 확보할 경우 기업의 패소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법원 판결 이전에 합의가 이뤄질 확률이 높아진다.

◆현행법상 증거확보 절차 실효성 없어 = 16일 한국증권법학회 9월 정기세미나에서 발표자로 나온 김주영 변호사는 "증거가 상대방에게 편재돼 있는 소비자소송, 환경소송, 특허나 저작권 등 지적재산권 소송, 증권금융소송 등의 경우에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지만 입증책임을 져야 하는 피해자(손해배상청구권자)의 불이익으로 (재판 결과가) 귀결된다"며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된다면 이러한 증거편재로 인한 불공평이 크게 해소될 것이며 재판 결과에 대한 예측가능성이 높아져 조기에 자발적 분쟁 해결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본격적인 재판 전에 소송청구권자가 소송에 관계되는 정보를 획득하고 보전하기 위해 법원의 관여 없이 당사자 주도로 서로 정보와 문서를 교환하는 절차를 말한다. 증거로 사용될 자료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을 허용함으로써 사실관계를 기초로 소송절차에서 공정한 경합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김 변호사는 A건설을 상대로 한 증권집단소송에서 분식회계혐의와 관련된 증거 확보를 위해 민사소송법에 명시된 △증거보전신청 △문서목록제출명령신청 △문서제출명령 △증인신청 △문서송부촉탁신청 △금융거래정보제출명령신청 △사실조회을 동원했지만 사실상 실효성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A건설이 갖고 있는 6개의 해외플랜트공사와 관련한 내부품의서, 기안서, 검토보고서, 발주처, 하도급업체, 자재공급업체, 회계법인 등과 수발신한 서신, 이메일, 팩시밀리 등 일체의 교신자료 등을 포함한 제반 문서의 표시와 취지를 적은 문서목록을 제출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A건설은 발주처, 하도급업체, 자재공급업체, 회계법인 등과 수발신한 서신, 이메일, 팩시밀리 등 교신자료들의 목록을 일절 제출하지 않았다. 사실상 문서목록제출명령신청에 불응한 것이지만 현행 민사소송법상 문서목록제출명령에 대한 제재수단은 없어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게 김 변호사의 설명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 필요" = 김 변호사는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한 후 얼마 안 있어서 A건설측에서 화해를 위한 비공식제안이 있었고 이후 화해가 이뤄졌다"며 "2013년 10월 소송이 제기된 후 1심판결이 끝나고 항소심이 계류된 이후인 2020년 12월에 화해가 이뤄졌으므로 무려 7년간의 법정 공방을 거쳐 화해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 디스커버리제도가 있었다면, A건설이 소지한 문서들이 현출되고 핵심 증인들에 대한 증언녹취 등이 진행되면서 진상이 조기에 드러나 소송 초기에 화해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가 언급한 A건설은 GS건설이며, 분식회계혐의로 피해를 입은 투자자 1만83명(배상청구권자) 중 26.4%인 2644명이 권리신고를 통해 86억6500만원 가량을 배상받았다. 소송이 오래 걸리면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피해자 7439명은 권리신고를 하지 않아 배상을 받지 못했다.

법조계에서는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법률 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19대 국회 때 민사소송법 개정안 등 관련 법안 3건이 의원입법 형태로 추진됐지만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는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해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주환 국민의힘 의원 등이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하는 등 현재 국회에 다수 개정안이 계류 중이지만 또 다시 임기만료로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최재형 의원 발의안에는 '증언녹취제'도 포함돼 있다.

김 변호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법원이 일정부분 관여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므로, 원고의 청구가 그 자체로 이유 없는 경우에는 디스커버리절차의 진행을 보류하는 등의 보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며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은 큰 틀에서의 발상의 전환과 사회 전체적으로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감당하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경기 김선일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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