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피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꽃이 만발한다. 꽃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속도가 놀랍다. 불과 사나흘 사이에 꽃잎이 만개한다. 100만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바위같은 고목에 하룻밤 새 피는 꽃은 초자연적인 신비로움을 웅변하는 듯하지만 정작 나무는 1년 내내 그 사흘을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만개한 꽃은 나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을 만들고 움과 싹과 순을 틔우며 일 년에 걸쳐 준비한 결과물이다.

과학기술의 급격한 변화에도 보일듯 말듯 진행되는 준비의 과학이 있다. 세상에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머피의 법칙이 있다. 과학자의 머피의 법칙은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난다'. 조금 더 하자면 ‘일어날 만한 일만 일어난다'. 과학에서 머피의 법칙이라는 화려한 드라마를 펼치기 위해 꼭 필요한 소품은 ‘시간'과 ‘축적'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를 쓴 토마스 쿤은 비연속적인 패러다임 변화가 과학 발전을 주도해왔다고 주장했다. 지구 중심의 천체 운동을 태양 중심으로 바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미적분 수학으로 우주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다는 뉴턴의 발상, 입자성과 파동성이 중첩된 언어로 원자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양자역학적 체계가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 변환에 해당한다.

하지만 쿤의 세계관은 삽시간에 꽃을 피우는 나무의 노력을 오직 기적으로만 보려는 관점처럼 보인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 결과물 밑에는 빙산의 몸체 같은 긴 침전 기간과 상호작용의 시간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기혁명이다.

300여년 준비의 시간 가진 전기혁명

1980년대의 개인 컴퓨터 보급, 2000년대의 인터넷 보급에 이어 2020년대의 보편적 인공지능(AI) 물결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전기문명의 토대 위에서 벌어졌다. 전기가 사라지는 순간 인공지능의 축복과 위협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전기문명이 형성되는 과정은 인류 문명의 역사를 기록할 때 꼭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변화이고 에디슨 테슬라는 그 속의 영웅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혁명'이 이루어진 과정은 3세기에 걸친 느리고 단계적인 변화였고 에디슨은 빙산의 꼭대기에서 그 변화를 마무리한 인물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보이지 않는 나무의 겨울눈같은 역할을 한 인물은 전기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창시자, 뉴턴보다 무려 한 세기 앞서 1544년에 태어난 영국의 의사 윌리엄 길버트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던 대항해시대를 살다 간 인물답게 길버트는 자석의 원리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항해를 통한 세계정복의 이면에는 나침반이란 도구가 있었고, 바늘이 항상 지구 북극 방향을 가리킨다는 신비한 성질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길버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실험적 실증적 연구를 통해 자석의 성질을 탐구했고 1600년에 ‘자석에 관하여’라는 위대한 저술을 남겼다. 커다란 공 모양의 자석을 만든 뒤 그 주변에 나침반을 놓으면 바늘이 공 방향을 향하는 실험을 근거로 ‘지구가 자석이다'란 주장을 했다. 의사였던 길버트에겐 피부에 따끔한 자극을 주는 정전기 효과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구 대상이었다.

전기와 자기현상에 대한 호기심은 이미 길버트 시대부터 짝꿍이었다. 과학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치인 손바닥을 대면 머리카락이 솟구치는 전기공을 호기심 많은 귀족과 대중 앞에 시연하는 것이 길버트 이후 유럽 사회의 오락이자 유행이 되었다. ‘번개는 전기다'를 증명하려고 연날리기 실험을 감행한 벤자민 프랭클린과 전기를 띤 두 공 사이에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 작아지는 전기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섬세한 실험으로 증명한 쿨롱의 위대한 업적은 길버트의 책이 출판된 지 무려 200년이 지나서였다.

전기혁명에서는 전기를 저장하고 가두는 장치인 건전지의 발명이 나무의 싹이었다. 1790년대를 풍미한 이탈리아인 갈바니와 볼타가 주도했던 건전지의 발명 덕분에 전기에 대한 체계적인 실험이 언제 어디서나 가능해졌다. 전기와 자기 현상을 한 묶음으로 보려는 시도는 전자석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전기문명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마지막 고리인 겨울 나무의 순은 마이클 페러데이가 발견한 전자기 유도 현상이었다.

이제 인류는 건전지가 없어도 전기를 ‘발전'할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이러한 토대 위에 에디슨 테슬라 웨스팅하우스가 발전에 사용할 최적의 전기모터를 만들었고, 마침내 거대한 전기 발전소와 전기문명이 20세기 초반부터 자리잡았다. 길버트의 책이 나온지 무려 300년 만이었지만 한번 피기 시작한 봄꽃이 하루만에 꽃대궐을 만들듯 전기혁명은 불과 반세기만에 지구인의 삶과 생활을 바꿔버렸다.

과학은 서두른다고 꽃피지 않아

불영과부진(不盈科不進). 전기문명이 만들어진 과정은 마치 일년 내내 밑작업해 사흘만에 꽃을 피우는 나무의 모습과 같다. 꽃을 피우는 나무도 과학발전을 통해 문명의 꽃을 피우는 과정도 모두 머피의 법칙을 따른다. 꽃은 필 만한 때가 되면 스스로 싹을 틔운다. 그 변화를 막을 수도, 재촉할 도리도 없다.

한번 꽃을 본 사람이라면 나무가 꽃을 안 피우는 나머지 시간이 아깝다고 나무를 잘라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년 봄 벚꽃놀이를 즐기고 싶다면 울퉁불퉁 줄기만 남은 벚꽃나무를 참아내고 가꿔야하는 것을 안다. 올해 과학기술 예산을 싹둑 깎은 것은 꽃이 안 핀다고 나무줄기를 사정없이 베어버린 꼴이다. 만화 영화 토이스토리2에서조차 “예술은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야(You cannot rush art)”라고 일갈했다. 과학도 서두른다고 꽃피지 않는다.

한정훈 성균관대학교 교수 물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