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업에 기술료 지급 과다 … 원천기술 절실, 수백억 들인 국책 연구개발사업 방향 잃어

한국가스공사 삼성중공업 SK해운 사이의 ‘한국형 액화천연가스(LNG) 선박 화물창 개발사업’(KC-1)이 장기간 법적다툼으로 변질되고 있다. 정부와 민간기업이 수백억원 투자한 KC-1 연구개발사업은 표류하고, 우리나라의 기술독립이 요원해지는 모양새다.

또 가스공사 소송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율촌의 한 고문이 가스공사와 소송을 벌이고 있는 삼성중공업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해충돌 논란이 일고 있다.

◆국내 독립기술 첫 출항때 결함 발생 = 21일 정부와 조선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 가스공사 조선3사(당시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는 20년전인 2004년부터 2009년까지 185억원(정부 83억원)을 들여 KC-1 사업을 추진했다. 원천기술이 없어 프랑스 기업에 막대한 기술료(로열티)를 지급하다보니 국산 화물창 기술을 국적선박에 적용하자는 ‘기술독립’이 목표였다.(관련기사 ‘10년간 LNG선박 기술료 5조원 지급’)

KC-1은 2014년 한국 미국 프랑스 등 주요국가에서 선급인증을 받았고, 상용화기술개발에 성공했다. 이어 2015년 육상용 LNG 저장탱크 기술을 보유한 가스공사가 설계를 맡고, 삼성중공업이 건조후 2018년 SK해운에 2척의 선박(SK세레니티, SK스피카)을 인도했다. 첫 결실이 맺어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SK해운으로 인도된 LNG선 2척은 첫 운항부터 문제가 생겼다. SK세레니티가 미국 사빈패스 터미널에서 가스를 싣고 경남 통영으로 오면서 화물창 외벽 일부에 ‘콜드스팟’(결빙)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콜드스팟은 LNG의 냉기(영하 162℃)가 선체 바깥으로 새어나가 선체 외벽에 전달돼 온도가 기준치보다 낮아지는 현상이다. 반복될 경우 외벽에 균열이 생겨 자칫 침몰 또는 폭발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때문에 SK세레니티와 SK스피카는 첫 출항 이후 6년째 운항을 중단하고 있다. 이 선박은 경남 거제도 앞바다에 정박했다 현재 말레이시아 사바주 라부안에 장기계선 중이다.

삼성중공업은 결함 발생후 4차례 수리과정을 거쳤지만 지난해 3월초 종료된 4차 시험에서도 콜드스팟이 재차 발생해 사업지속이 사실상 한계에 봉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가스공사, 법원 1심판결서 완패 = 이 과정에서 가스공사와 삼성중공업, SK해운은 설계결함·제조결함·책임소재 공방을 벌이며 2019년 소송에 들어갔다.

삼성중공업은 선박수리비 801억원, SK해운은 선박 미운항 손실료 1158억원을 각각 가스공사에 청구했다. 가스공사는 SK해운에 대체선 투입에 따른 손실액 1697억원을 청구했다.

긴 법적다툼 끝에 2023년 10월 1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가스공사는 삼성중공업에 726억원, SK해운에 1154억원을 각각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가스공사의 배상액은 총 1880억원으로 삼성중공업이 청구한 수리비 801억원의 약 90%, SK해운이 청구한 금액 1158억원의 약 99%에 이른다.

가스공사 청구는 기각됐다. 법원은 “콜드스팟 발생 책임은 설계자인 가스공사에 있으므로 SK해운의 손해배상을 면제한다”고 판결했다. 화물창 결함은 선박 건조 문제가 아닌 설계상의 문제, 즉 가스공사의 책임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가스공사는 1심 판결에 불복해 지난해 11월 항소했다. 가스공사는 “법무법인 등과 면밀히 검토한 결과 1심 판결에 대하여는 콜드스팟 발생 원인과 공사의 책임을 둘러싸고 사실관계, 법리적용 등 다툼의 여지가 많다고 판단돼 항소를 제기했다”고 밝혔다.

KC-1 소송은 2017년과 2019년에 걸쳐 4~6여년간의 심리와 2023년 8월 한 차례의 판결선고 연기를 거쳐 10월에서야 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항소심 다툼도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재판소는 SK해운 손들어줘 = 이와 함께 삼성중공업과 SK해운은 영국 중재재판소에서 소송을 진행했다. 영국 중재재판소는 2023년 12월 삼성중공업에게 “SK해운의 특수목적법인(SPC)에 LNG운반선 2척에 대한 선박 가치하락분 2억9000만달러(3781억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다만 영국 중재재판소의 판결은 삼성중공업이 선박을 합리적인 기간 안에 완전히 수리하지 못한 책임이 있음을 물은 것일 뿐 KC-1 결함 책임까지 물은 것은 아니다. 이에 삼성중공업은 가스공사측에 영국 중재재판소 판결에 대한 배상비 구상권을 청구했다.

한편 삼성중공업과 한국선급은 결함선박 수리과정에서 해수 온도 6℃ 이상에서 운항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하지만 선주사인 SK해운은 안전성 문제, 상업적 비효율성 등으로 선박 운항을 거부하고 있다.

한국선급의 판정이 실제 운행에서 충족될 수 있을지 확신을 못하는데다, 실행하더라도 특정항로만 운행해야 한다는 제한이 생긴다. 이는 최적의 물류경로를 선택하고, 다양한 항로를 운행하며 최대한의 수익성을 확보해야 하는 기업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으로 분석된다.

일부에서는 “SK해운이 카타르 등 가스도입국에 KC-1 선박운항을 의뢰한 결과 안전성을 이유로 거부당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에 대해 가스공사는 “4차 시험선적에서 해수 온도 6℃ 이상의 해역에서 운항이 가능해 대체항로 운항을 제안했음에도, SK해운이 운항 재개에 협조하지 않아 결국 관련사 간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국~중동, 한국~호주 항로에는 이 선박을 활용할 수 있는데, 손실발생의 책임을 가스공사와 삼성중공업으로 떠넘기려고만 한다는 주장이다.

◆국책과제 KC-2 상용화는 미지수 = 이 과정에서 정부는 KC-1와 별개로 2017~2023년 KC-2 개발사업에 들어가 159억원(정부 62억원)을 투입했다. 개발된 화물창은 선급인증을 받았으나 KC-1으로부터 촉발된 법정 공방 등이 맞물리면서 아직 상용화기술개발에 착수하지 못했다.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등 조선 3사가 국책사업과 별개로 독자모델 개발에 나서면서 동력마저 잃어버린 탓이다. 실례로 HD현대중공업은 2023년 4월 7.5K급 규모의 화물창을 설계해 가스공사 자회사인 한국LNG벙커링에 인도했다.

삼성중공업도 2023년 10월 6K급 규모의 화물창을 자체적으로 LNG공급전용선박에서 운용 중이다. 한화오션은 독립형모델개발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조선 3사가 개발한 화물창은 국책과제로 진행된 KC-1·2의 17만4000K급보다는 크게 작지만 원천기술은 동일하다”며 “독자적으로 기술개발에 나서 성과를 올리고 있기 때문에 국책과제로 개발된 KC-2 상용화의지가 미약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지리한 법적다툼은 KC-2 보급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가스공사가 KC-1과 KC-2 화주인데 KC-1에 대한 국내업체간 논란이 지속된다면 해외 화주와 선주들이 국산 화물창 기술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또 가스공사가 소송전에서 패소할 경우 그 부담은 국민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가능성도 문제다. 가스공사는 2023년 기준 부채가 47조4000억원에 이른다. 민수용 도시가스 미수금은 13조원이 발생해 적자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소송에서 패해 추가비용이 발생한다면 부채로 충당할 수밖에 없고, 이는 재무건전성을 더욱 악화시켜 가스요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

◆기술독립 “포기말고 계속 추진해야” = 정부와 업계에서는 조속한 해결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소송이 장기화되면서 우리나라가 LNG 선박 시장에서 점유율을 빼앗기지 않겠냐는 우려도 나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후 세계적으로 LNG 운반선 수요가 증가하는데다, 우리 조선업체의 기술력이 앞서고 있는 만큼 기술 국산화에 힘을 모아야 한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소송 당사자간 합의는 까마득해 보인다.

가스공사측은 “법무법인 등과 면밀히 검토한 결과 1심 판결에 대해서는 콜드스팟 발생의 원인과 공사의 책임 인정을 둘러싸고 사실관계, 법리적용 등에 대한 다툼의 여지가 많다고 판단해 항소를 제기했다”며 “항소심 대응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초 가스공사 내부에서는 합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항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공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중공업 측은 “당사자간 합의가 안돼 영국 중재재판소의 판결금도 가스공사와 소송으로 가게되었다”며 “하지만 정부와는 대화하며 해결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가스공사·SK해운과의 대화는 거리를 두되 정부와 대화하겠다는 입장을 우회해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산업부는 “KC-1이 법적 소송중이고, KC-2는 상용화개술개발에 착수를 못해 아쉬움이 있다지만 개발과정에서 쌓은 기술력, 노하우 습득의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는 입장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개별 조선업체들이 추진하는 한국형 화물창 기술개발사업을 적극 도울 것”이라며 “양산위한 실증테스트, 대량생산체제 진입시 인프라 구축, 선가보조(보조금) 등의 지원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신형 서울대 교수(전 대한조선학회장)는 “프랑스 GTT의 화물창 기술개발은 96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며 “KC-1 개발후 한번 문제가 발생했다고 포기하지 말고 설계-건조작업을 보완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제대로 한번 해보지도 않았다”며 “선주는 규모가 작다고 안하고, 해운사들은 위험한 배여서 안한다고 하는 등 당대 이익만 보려고 하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의견들도 있다”고 전했다.

◆전 산업부 장관, 이해충돌 논란 = 한편 가스공사는 KC-1 결함소송과 관련해 법무법인 율촌을 소송대리인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율촌 고문으로 있는 윤상직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삼성중공업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스공사 입장에서는 삼성중공업과 소송을 전개하고 있는데,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고문이 소송대상사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법률계 한 관계자는 “이러한 사실은 이해충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며 “이해 충돌은 한쪽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로펌(변호사)이 동시에 다른 쪽의 이익과도 연결될 때 발생한다”고 말했다.

이어 “율촌 고문이 삼성중공업의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면, 율촌이 한국가스공사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기 어려울 수 있다”며 “이는 소송에서의 공정성과 신뢰성, 투명성과 독립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법률 윤리규정에 따르면 변호사나 법률 회사는 이해 충돌을 피해야 하며, 만약 불가피한 경우 이를 고객에게 명확히 설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에 대해 율촌 측은 “한국가스공사 측에서 이해상충 우려가 있다고 강력히 항의를 해왔다”며 “하지만 윤 고문은 이번 소송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관련 자료와 정보에도 일절 접근할 수 없도록 조치돼 있어 이해상충 우려가 전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재호 정연근 기자 jhlee@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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