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본진을 자임하는 나라들의 정치가 어수선한 시절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이끌어왔던 미국 정치도 흔들린다. 극우로 분류되는 국민연합의 의회 집권은 간신히 막았다지만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내건 혁명의 후예 프랑스 정치도 이전 같지 않다. 유럽 몇몇 나라에서 나타나는 극우파의 결집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이 와중에 이란에서 특이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개혁파 대통령이 등장한다는 소식이다. 서구의 시선으로 볼 때 가장 반(反)민주주의적인 신정국가에서 체제 핵심 권부와 결이 다른 대통령이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신선했다. 보궐선거였고 이란 정치의 보수적 지형상 으레 전임과 비슷한 결의 후보가 당선되려니 하다가 갑작스런 결과에 다들 놀라고 있다.

투표율 올리려던 최고지도자의 오판

의외의 결과를 얻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최고지도자와 핵심권부의 오판 때문이었다. 지난 5월 19일 불의의 헬기 사고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사망하고 불과 한달여 만인 6월 28일 보궐선거가 시행되었다. 전략적 숙고와 판단을 거쳐 선거를 준비하기에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전임 라이시는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복심이었다. 권력의 충직한 부하였던 라이시의 급작스런 부재로 핵심권부 주요 인사들은 당황했다. 고심하며 판을 짜기도 전에 대선 출마 후보들이 난립했다. 최고지도자가 지명한 6명의 성직자와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이슬람법학자 6명으로 구성되는 헌법수호위원회에서 후보 자격을 심사한다. 최고지도자는 자신의 보수적 입장을 승계하고 이끌어갈 파트너를 급히 골라야 했다. 전형적인 보수 지도자들 위주로 후보를 추렸다.

여기에 변수가 하나 있었다. 투표율이다. 라이시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2021년 선거 당시 기록적으로 낮은 투표율이 문제가 됐다. 그땐 온통 보수파 후보 일색이었다. 중도성향의 후보도 있었지만 무의미했다. 개혁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은 투표를 포기했었다. 누가 보아도 라이시를 옹립하는 선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투표율은 역대 최저인 48.78%였다. 절반에 못미친 투표율은 이란이슬람공화국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 직전 2017년 로하니 재선 당시 투표율이 73.33%였음을 기억하면 급전직하였다.

의도대로 라이시 대통령이 당선되었지만 최고지도자와 지도부는 당황했다. 투표하지 않은 51.22%는 적어도 체제를 반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는 ‘선거에 기반한 신'이라는 이란이슬람공화국의 정통성을 현저히 약화시킨다. 신의 뜻이 무슬림 유권자의 투표를 통해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수도 테헤란의 기록적 최저 투표율은 더 심각했다. 체제 입장에서 침묵하는 다수는 심연과도 같은 공포다.

따라서 최고지도자는 이번 보궐선거 투표율을 적어도 50% 이상으로는 끌어올려야 했다. 그래야 최소한의 정통성을 얻는다. 동시에 보수파 후보를 당선시켜야 했다. 이 두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섬세한 계산이 필수적이었다. 개혁중도파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개혁진영 후보 출마를 허락하되, 그렇다고 경쟁력이 있어서 보수파 후보를 이기면 안되었다.

고민 끝에 선택한 개혁진영 후보가 페제시키안이었다. 20여년 전 개혁파 대통령인 하타미 내각 각료출신이기에 기본적으로 개혁파로 분류되지만 강성은 아니다. 온화하지만 대중을 휘어잡는 스타일이 아니다. 개혁파이면서도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여러차례 언급했다. 온건개혁파 정도로 분류되는 이미지였다. 최고지도자는 페제시키안 정도를 내세우면 대략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개혁 유권자들의 표를 끌어내고, 결선투표에서 주류 보수파가 결집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오판이었다. 페제시키안은 보수파를 누르고 결선 투표에서 당선됐다. 복기해보면 이란이 겪어온 경제난과 사회갈등이 생각보다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체념했던 개혁성향의 유권자들 일부가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1차 투표에 나섰다. 여기서 페제시키안이 의외의 1위를 기록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1주일 후 결선투표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10%에 달하는 600만명이 새롭게 결선투표장에 나타나 표를 던졌다. 거의 정확히 이 표만큼을 페제시키안이 얻으며 승리를 확정지은 것이다.

대통령 통제할 수 있지만 민심은 어려워

그렇다면 최고지도자는 당황해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약해 보여도 페제시키안을 후보로 승인할 때는 혹시 모를 최악의 시나리오 역시 상정해 놓았을 법하다. 노회한 사람이다. 이렇게 된 이상 개혁파 대통령을 활용하려 할 것이다. 차제에 경제난을 해소하기 위해 그나마 통제가능한 대통령을 앞세워 약간의 숨 쉴 공간을 만들어내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모른다.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페제시키안이 당선됨으로써 안으로 펄펄 끓던 개혁성향 유권자들의 불만을 일단 완화시키는 효과도 있다. 효용이 하나 더 있다. 향후 경제회복에 실패하고 사회문제가 심화될 경우 대통령과 내각 책임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다. 이란 최고지도자와 핵심 권부는 그렇게 만만한 이들이 아니다.

최고지도자에 비해 실질적 권한이 별로 없는 대통령의 등장으로 당장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당분간 현 강경 정책기조가 일정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더 높다. 군과 언론 사법부 등 핵심 영역의 권력과 조직을 장악한 최고지도자를 대통령이 좌우할 수는 없다.

다만 한가지 유심히 보아야 할 점이 있다. 제도와 물리적 권력이 보장하는 힘이 아닌 또 다른 층위의 힘이 있다. 바로 민심이다. 비록 대통령직은 최고지도자에 비해 약하나, 페제시키안을 그 자리에 보낸 힘은 유권자들의 투표이자 변화를 바라는 민심이었다. 극적인 정책 변화를 조만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이제 민심을 눈으로 확인한 최고지도자와 핵심 권부는 마냥 일방적 억압정책을 펴기 어렵게 된 셈이다.

어떻든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최고지도자는 여전히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50%의 유권자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그렇다면 당면과제는 일단 경제난을 해소하기 위한 일정부분의 개혁과 개방이어야 한다.

한편 히잡 시위로 불거졌던 청년들의 불만과 여성들의 억압적 복식 규정을 완화하는 포석을 해야 한다. 이는 변화의 요인이 된다. 대통령과 내각의 힘이 제도적으로 이 일을 추진할 만큼 갑자기 커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 뒤에 서 있는 침묵하는 다수 국민들의 목소리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잠시 권력을 유지할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선거가 무서운 이유다.

이란의 미래 좌우할 변수는 미국 대선

한가지 걱정이 있다. 미국과의 관계다. 이란의 대외관계에 있어 중요한 국가 중 하나가 미국이다. 어쩌면 제일 중요한 변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전 이후 양국 리더십은 희한할 정도로 성향이 엇갈렸다.

미국과 관계 개선을 원하던 하타미정부 때는 미국의 부시 네오콘 행정부가 이란을 악의 축으로 몰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란을 정상국가로 상대하려 할 때 이란 대통령은 강경 반미주의자인 아흐마디네자드였다. 오바마와 합이 맞는 이란 로하니 대통령이 잠시 겹치는 시기에 핵협상을 타결한다. 그러나 곧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 제재를 복원시켰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란핵합의 재개 방침을 천명했지만 곧 이란은 강경 보수파 라이시가 등장했다.

마치 누가 각본을 짠 것처럼 두 리더십이 엇갈렸다. 물론 최고지도자의 존재로 인해 이란 대통령이 누구냐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든 국민의 선택으로 세워진 정부이기에 무게감을 부정할 수 없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만일 바이든이 재선된다면 그나마 이란-미국 관계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되면 만만치 않은 갈등과 긴장이 일상이 될 것이다. 이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주요 변수 중 하나가 미국 대선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전략지역연구부장